신생 정당의 블록체인 공천 실험
지난 8월 28일 출범한 신당 ‘한국의희망’의 또 다른 이름은 ‘블록체인 정당’이다. 블록체인 기술을 기반으로 한 ‘탈중앙 자율적 정당’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와 IT기술의 결합이 낯설게 느껴지지만, 당을 이끄는 양향자 의원은 “IT강국 대한민국에서 가장 구태의연한 시스템을 가진 분야가 바로 정치”라며 정당 개혁을 주장한다. “돈봉투 사태 등 기존 거대 양당이 저지른 부정 탓에 한국 정치권에는 불신이 만연하다. 투명사회 구현을 위해서는 선한 의지가 아닌 선한 시스템에만 기대야 한다”는 것이다.
블록체인 기술은 ‘중앙집권형’이 아닌 ‘분산형’이란 특징을 가진다. 한국의희망은 그동안 한국 정당이 거대한 중앙당과 막대한 권한을 가진 당대표가 의사결정 및 당직 인선, 공천권을 모두 행사하는 ‘중앙집권 비자율적 정당’이었다고 꼬집는다. 이런 구태와 독점을 타파하기 위해 도입한 것이 블록체인 플랫폼이다. 블록체인 기술의 투명성, 불변성, 안전성을 활용해 필요한 정당 정보를 모두 공개하고, 더 많은 국민이 참여하는 정치 시스템을 구축하겠다는 것이다.
일단 한국의희망은 분산형 장부를 도입해 자금의 흐름을 투명하게 관리하고 있다. 타 정당도 회계보고를 주기적으로 하고 있지만, 당원 관리, 회계 관리, 당비 사용처 불투명 등의 문제가 있어 왔다. 한국의희망은 이러한 문제점에 기반해 실시간으로 계좌내역을 공유하는 시스템을 도입했다. 누구나 언제든 내가 낸 당비나 후원금이 얼마이고 언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알 수 있다. 정보경 한국의희망 전략기획 부총장은 “당 계좌 정보를 오픈해서 후원금, 당비 등 여러 정치자금의 입출금을 위퍼블릭의 미러링 기술을 활용해 1시간마다 업데이트해서 공개하고 있다”며 “실제 은행당 계좌의 잔고와 위퍼블릭(블록체인 플랫폼)의 잔고, 그리고 선관위 회계관리 시스템의 잔액이 동일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1000원의 당비를 체크카드로 써도 바로 위퍼블릭에 반영이 되니까 자금을 사용할 때 고민을 많이 하게 된다”고 덧붙였다.
정치자금 입출금 1시간마다 공개
그러나 해당 계좌 잔고가 선거관리위원회(선관위) 회계관리 시스템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려면 넘어야 할 산이 많다. 기존 선관위 시스템의 선진화, 정치자금법 개정 등이 진행되어야 한다. 정당 및 국회의원은 현재 정치자금의 수입과 지출 결산, 예금통장의 사본 등을 정기적으로 관할 선관위에 보고하도록 하고 있다.
이를 온라인을 통해 상시 공개하도록 하는 방안을 선관위 차원에서도 계속해서 도모하고 있다. 누구나 자유롭게 정치자금 회계 내역을 검색, 분류, 다운로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다. 선관위 측은 “국민의 감시, 통제를 강화하고 정치자금 관련 부정을 방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필요성을 통감한다”며 “그러나 정치자금법 개정이 필요한 사항으로, 중앙선관위에서는 관련 개정안을 여러 차례 국회에 제출하는 등 노력 중이다”라고 설명했다. 일각에서는 해당 개정안이 과거부터 선관위 측에서 추진한 내용이기에, 정치권에서 불편을 초래한다는 이유로 입법이 지지부진하다는 의혹도 제기된다.
한국의희망은 창당 과정에서의 당원 가입 절차를 간소화하는 방법도 모색하고 있다. 현재 창당 과정에서 당원 입당 원서는 종이로 받아 취합해 선관위에 제출하고 있다. 원서를 종이로만 받다 보니 비효율이 발생한다. 예컨대 창당 과정에서 최초로 온라인 당원 신청을 받았다는 기본소득당의 경우, 온라인상에서 개인 인증을 하고 당원 신청을 한 경우라도 종이 서류가 필요해 사본으로 다시 작성해 선관위에 제출해야 했다. 한국의희망의 블록체인 시스템은 익명성이 보장된 상태로 인증이 되다 보니 개인정보를 확인할 수 없어 기존 시스템에 적용되기가 더욱 어려웠다고 한다. 선관위 측은 “당의 취지는 충분히 공감하고 도움이 되고자 했지만 입법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어 힘들었다”고 말했다.
총선을 앞두고 거대양당은 공천 진통을 피하기 힘들다는 관측이 나온다. 이에 반해 한국의희망은 공천 기준에 대해 당원 의견을 취합하는 것부터 후보 선정, 특정 공천자 선정까지 당원투표로 결정할 예정이다. 밀실공천, 벼락공천 등 그동안 정치권에서 있어온 불합리한 의사결정 과정을 투명화하고 당내 사안에 대해 당원의 의견을 더욱 반영하는 등 민주화하겠다는 것이다.
정 사무부총장은 “예컨대 한국의희망에서 운영하는 정치학교를 졸업했을 경우 공천 우대를 해주는 등의 기준에 대해 당원 의견을 손쉽게 묻고 전자투표를 행할 수 있다. 안건 발의부터 투표의 진행, 결과도 투명하게 기록된다”고 설명했다. 양향자 의원은 “공천의 공정성을 보장하고, 당대표의 독선, 대의원의 과대표 등의 구태도 막을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정당에 블록체인 기술을 도입하면 다른 정당들도 따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국민들이 우리와 같은 투명성을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시민단체, 종교단체 등에서도 사용하리라 본다”라고 말했다.
공천자 선정도 당원투표로 결정
한국의희망은 앞서 말한 △자금관리 △의사결정과정 선진화 및 민주화 △당원의 효율적 관리라는 기능을 가진 ‘정당 애플리케이션’ 또한 10월 중 오픈할 계획이다.
김남국 코인 게이트 논란으로 블록체인 기술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높아졌다는 점도 하나의 과제다. 블록체인 개념 자체가 대중들에게 아직 낯선 상태에서 신기술이라기보다 코인 등 투기에 관여돼 있다는 낙인부터 찍힌 것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블록체인의 본질이 투기가 아닌 기술이라고 강조한다. 황석진 동국대 국제정보대학원 교수는 “코인과 블록체인 기술은 별개의 문제”라며 “모 국회의원의 코인 사태는 프라이빗한 투자를 하는 과정에서 투명했냐는 것이고 블록체인 기술은 위·변조가 되지 않는 퍼블릭한 개념이다”라고 설명했다. 개인정보 유출 우려에 대해서도 “IT적으로 가입하는 모든 것에는 해킹 등 보안에 대한 위협이 어쩔 수 없이 존재한다”며 “오히려 블록체인 기술은 더 안전하다”고 설명했다.
과거에도 이런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19년에는 자유한국당이, 2020년에는 국민의당이 ‘블록체인 정당’을 구상했었다. 김병준 당시 자유한국당 비대위원장은 국회의원과 당원의 활동에 따라 암호화폐를 지급하고, 향후 공천 및 당내 선거에도 활용한다고 밝혔었다. 그러나 약 한 달 후 황교안 대표가 선출되고 김 비대위원장이 물러나면서, 블록체인 정당 계획은 무산됐다. 이후 황교안 지도부에서 꾸려진 ‘2020 경제대전환 특별위원회’가 암호화폐 공개(ICO) 전면 허용과 암호화폐 합법화, 거래소 양성화 등 적극적인 암호화폐 육성 정책 추진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를 냈지만, 이후 여야의 극한대립과 장외투쟁 등을 거치며 실질적인 성과를 보지 못했다.
안철수 의원의 국민의당도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투명한 혁신정당’을 꿈꿨었다. 당 공식회의 자료 등 공문서 관리 시스템을 도입하고, 당 예산 결산자료 실시간 상시공개, 외부회계기관 검사를 구상했었지만 국민의힘과의 합당으로 혁신은 흐지부지됐다.
황석진 교수는 정치와 블록체인 기술의 결합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대부분의 분야에서 디지털화가 진행되고 있다. 선거제도 등 정치권도 자연스럽게 변해가리라고 예상한다. 신분증이나 임명장을 NFT화해서 블록체인상의 당직자 아이디에 넣는 등 블록체인 기술의 활용 범위는 무궁무진하다. 다만 그 범주를 어디까지로 할 것인가에 대해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전자투표를 할 때 시공간의 제약이 줄어드는 등의 장점이 있지만 블록체인상에서는 투표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등 비밀투표가 불가능하다는 한계도 있다. 당원들끼리 블록체인으로 투표하겠다, 대신 철저하게 익명권을 보장하겠다 등 합의를 통해 보완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의희망 한 관계자는 “블록체인 기술이 정치에 도입되면 종이 자원 낭비를 줄여 환경적으로도 도움이 된다”며 “데이터도 물론 탄소가 배출되지만, 종이가 낭비되는 정도에 비하면 훨씬 적다”는 장점도 제시했다.